구절판(九折板)은 우리 전통 한식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궁중 음식 중 하나로, 그 이름처럼 아홉 칸으로 나뉜 둥근 나무 그릇에 아홉 가지 색과 맛을 담아내는 고급 요리입니다. 조선시대 궁중 연회나 상류층 가정의 귀한 손님 접대용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각각의 칸에는 다채로운 색의 재료가 들어가며, 중앙에는 얇게 부친 전병이 자리하여 모든 재료를 싸서 먹을 수 있도록 구성됩니다.
구절판의 본질은 ‘조화’에 있습니다. 채소, 고기, 버섯, 해산물 등이 각각의 고유한 색과 향을 유지하면서도 한입에 어우러질 때 완벽한 맛의 균형이 완성됩니다. 이러한 조화는 단순한 미식의 차원을 넘어, 음양오행의 철학을 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즉, 다섯 가지 색(청·적·황·백·흑)이 조화롭게 담겨야 건강과 복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구절판이 궁중 연회에서만 볼 수 있는 요리가 아닌, 명절이나 특별한 날 가정에서도 즐길 수 있는 전통 요리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전통의 품격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현대식 주방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정통 궁중 구절판 레시피를 단계별로 안내합니다.
채소의 손질법, 고기의 밑간 비율, 전병의 부치는 요령, 그리고 담는 법까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며, 한식의 정갈함과 깊은 맛을 모두 담은 구절판 한 상을 완성해 보세요.
색과 식감이 살아있는 채소 손질
구절판의 기본은 바로 색감과 식감의 조화입니다. 채소는 가능한 한 고유의 색을 살려야 하며, 너무 오래 익히거나 양념을 과하게 하면 본래의 맛이 사라집니다. 전통 구절판에 사용되는 채소는 주로 오이, 당근, 표고버섯, 미나리, 도라지, 숙주, 달걀지단, 무채 등으로 구성됩니다. 각각의 재료는 색깔이 다르고, 역할이 다릅니다.
먼저 오이는 길게 채 썰어 소금을 살짝 뿌려 물기를 뺀 뒤, 기름을 거의 두르지 않은 팬에 살짝 볶아 초록빛을 살립니다. 당근은 비슷한 길이로 썰어 소금 간만 살짝 하고 짧게 볶아 선명한 주황색을 유지합니다. 표고버섯은 기둥을 제거하고 채 썰어 간장, 참기름, 설탕 약간으로 양념해 볶으면 풍미가 깊어집니다. 도라지는 소금으로 주물러 쓴맛을 제거한 후, 데치고 참기름에 살짝 무칩니다.
숙주는 데친 후 물기를 꽉 짜고 간장과 마늘로 조미합니다. 미나리는 끓는 물에 소금 약간을 넣고 데친 뒤 찬물에 헹궈 색을 고정합니다. 달걀은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해 각각 지단을 부쳐 가늘게 썰어 노랑과 하양의 대비를 줍니다.
이 모든 채소는 길이를 6~7cm, 굵기를 균일하게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구절판에 담았을 때 시각적으로 조화롭고, 전병에 싸서 먹을 때 식감이 일정합니다. 재료의 순서는 색의 대비를 고려해 배열하면 더욱 품격 있는 궁중식 구절판이 완성됩니다.
고기와 양념의 깊은 맛
채소가 구절판의 색을 담당한다면, 고기는 맛의 중심을 잡습니다. 전통 구절판에는 주로 소고기 산적 또는 불고기식 양념고기를 사용합니다. 양념의 핵심은 짜지 않으면서 감칠맛을 주는 간장 비율입니다.
소고기 200g을 채 썰어 간장 1스푼, 설탕 ½스푼, 다진 마늘 1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깨소금 약간, 후추 약간으로 밑간 합니다. 10분 정도 재운 뒤 팬에 기름을 약간 두르고 센 불에서 빠르게 볶아 육즙을 가둡니다.
전통 방식에서는 소고기 대신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궁중에서는 주로 양지머리나 우둔살처럼 기름기가 적고 단단한 부위를 사용했습니다. 육즙이 적어 자칫 퍽퍽할 수 있으므로, 양념에 배를 갈아 넣거나 참기름을 약간 더 추가하면 감칠맛이 살아납니다.
또한, 현대식 구절판에는 쇠고기뿐 아니라 새우볶음이나 해산물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특히 새우살을 다져서 간장양념에 볶으면 단백질이 풍부하고 색상도 아름답게 어울립니다.
고명으로 쓸 때는 볶은 고기를 종이타월에 올려 기름기를 빼야 깔끔하며, 재료별로 간을 조금씩 다르게 해 전체적으로 짜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고기는 각 채소와 어우러져 풍미의 중심을 이루며, 전병에 싸 먹을 때 고소함과 단맛이 어우러져 구절판의 풍성한 맛을 완성합니다.
전병 부치기와 담는 법
구절판의 중심에는 **전병(밀전병)**이 자리합니다. 전병은 밀가루 반죽을 얇게 부쳐 각 재료를 싸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궁중식 만두피 역할을 합니다. 전병은 얇고 매끄럽게 부쳐야 하며, 찢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밀가루 1컵, 달걀 1개, 소금 한 꼬집, 물 1컵을 넣고 덩어리 없이 부드럽게 반죽합니다. 체에 한 번 걸러주면 더욱 매끈한 전병을 만들 수 있습니다. 팬을 중불로 달군 뒤, 키친타월로 기름을 살짝 닦아내고 반죽을 국자 한 국자 정도 떠서 얇게 펴줍니다. 가장자리가 살짝 말리면 뒤집고 10초 정도만 더 익힌 후 꺼냅니다.
전병을 여러 장 부친 뒤, 접시에 차곡차곡 올려 식히면 서로 달라붙지 않습니다. 완성된 전병은 구절판 중앙에 둡니다.
이제 채소와 고기를 각각 칸에 나눠 담습니다. 색깔의 대비를 고려하여 초록-노랑-갈색-하양-빨강이 번갈아가며 배열되도록 하는 것이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답습니다. 담을 때는 각 재료를 단정하게 세워 담고, 고명은 중간중간 높이를 맞춰 균형감을 줍니다.
전통적으로 구절판을 완성할 때는 금박이나 화문 모양의 장식이 새겨진 나무판을 사용했지만, 현대에는 유리나 도자기 접시를 활용해도 충분히 품격 있는 비주얼을 낼 수 있습니다.
완성된 구절판은 중앙의 전병을 펼쳐 각 재료를 조금씩 넣고 말아 한입 크기로 먹습니다. 부드럽고 향긋한 채소, 감칠맛 나는 고기, 쫄깃한 전병의 조화가 어우러질 때 구절판의 진정한 맛이 완성됩니다.
결론
구절판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한국의 미학과 철학이 담긴 전통 음식입니다. 색의 조화, 맛의 균형, 담음새의 정갈함은 조선 궁중의 품격을 상징합니다. 채소의 아삭함, 고기의 풍미, 전병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져 한 입에 전통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2025년 현재, 구절판은 명절이나 손님 접대용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으며, 건강식으로도 인기가 높습니다. 인공조미료 없이 재료 본연의 맛으로 완성되는 구절판은 세대를 초월한 한국의 자랑스러운 미식입니다. 올해 명절에는 직접 구절판을 만들어 가족과 함께 전통의 정성과 품격을 느껴보세요.